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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물
4.외세침략에 맞선 격전지(정족산성, 문수산성)

외세침략에 맞선 격전지(정족산성, 삼랑성)

여러분은 전국체육대회의 성화에 불을 붙이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나요? 바로 강화도의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입니다. 《고려사》에 보면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 드리던 제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시조이신 단군할아버지와도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강화도에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했다는 산성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정족산성입니다. 이 정족산성은 이런 유래 때문에 삼랑성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언제 쌓았을까요?

이 성을 언제 쌓았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이 성에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성의 쌓은 기법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성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강화도는 고구려에 속하기 전인 400여 년간 백제의 중요한 국경지방이었고,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백제 전기에 중요한 요새 역할을 했기 때문에 백제시대의 성일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고려 고종 임금 때 중랑장 벼슬에 있던 백승현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삼랑성 안에다가 임시로 절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와서는 이곳에 정족산사고를 마련하여 실록을 보관케 했고 선원보각이라는 것을 지어서 그곳에는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답니다. 이들 실록과 족보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아는 데 무척이나 중요한 자료들이며, 오늘날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866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했던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그들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양헌수 장군을 기리는 비 또한 성안에 있습니다.


성안에는 어떤 문화유적이 있을까요?

정족산 삼랑성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절중에서 삼국시대에 지어진 ‘전등사’가 있습니다. 이 절은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째 되던 해에 아도화상이 진종사를 연 데서 비롯했다고 하는군요.
이곳 전등사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의 원비인 정화공주 왕 씨가 불전에 옥으로 만들어진 등 잔을 올린 뒤부터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등사는 후에 조선 숙종 임금 때부터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1866년 병인양요를 겪고 난 이후 사고가 1909년에 서울로 옮겨짐으로써 그 역할은 끝나게 됩니다.
전등사에 전해지는 유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철종 입니다. 이 종은 우리나라 종과는 형ㄴ태가 전혀 다른 중구에서 만들어진 중국 종으로 무척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호)

김포 문수산성

1866년 병인년에는 서양세력이 쳐들어온 병인양요가 있었습니다. 병인양요 때 적군을 통쾌하게 무찌른 성에 대해 한번 알아봅시다.
언제, 왜 만들어졌을까요? 그리고 어떤 활약을 했을까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김포 문수산성은 사적 제139호로 경기도 김포시 월곡면 또내리에 있는 조선시대 석성입니다.
이 산성을 갑곶진과 함께 강화도의 입구를 지키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이 성이 세워진 것은 1694년(숙종 20년)입니다. 말끔히 다듬은 돌들로 정교하게 성을 쌓았고, 그 위에는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몸을 숨겨서 쳐들어온 적군을 공격하는 곳입니다)가 둘러져 있습니다. 당시에 성문은 취예루, 공해루 등 3개의 문루 특히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습니다. 바로 강화도에서 육지로 나올 수 있는 길목이었던 것이지요.(궁으로 들어가는 문을 말합니다. 성벽의 문 위에 다락방처럼 지은 것을 가리키지요)와 암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문수산성은 조선시대에 강화도를 지키는 무척 중요한 성이라고 했지요. 특히나 이곳은 “문수산성 싸움”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답니다. 이것은 1866년에 있었던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진 싸움입니다. 당시에 어린 임금이었던 고종을 대신해 정치를 하던 대원군은 외국 세력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1866년(고종3년) 서양 종교였던 천주교 탄압령을 내렸고, 불과 몇 개월 동안에 9명의 프랑스인 신부와 남종삼, 정의배 등 8,000여명의 천주교도들이 사형을 당합니다. 이 이을 계기로 조선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 전쟁에서 조선이 주로 수비를 하던 곳은 문수산성과 정족산성 일대입니다. 그리고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을 격퇴 시켰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프랑스 제국의 위신은 여지없이 떨어졌고,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을 더욱 고집하면서 천주교 탄압을 더 심하게 했습니다. 한번 병인양요 때 그들이 탈취해 간 많은 서적과 자료는 후일 유럽학자들이 한국과 동양을 연구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군요. 그러나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르면서 문수산성은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 자리는 마을이 되었고, 문수산의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 남아 있습니다. 조선을 지켜준 문수산성의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안타깝네요. 이 산성도 언젠가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복원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