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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3.직물공예(한산모시짜기, 나주샛골나이,명주짜기)

◑ 한산모시짜기
시원한 여름을 위한 옷감 - 모시

한산 모시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지역에서 생산되는 저마(모시풀)의 속껍질을 우리나라는 모시풀을 재배하기에 매우 적합한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 통일신라 때부터 우리나라의 모시는 유명했다고 합니다.
옛 글에도 보면 “결백하기가 옥과 같다”라는 표현으로 그 섬세한 부드러움을 표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한산모시는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여,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는 말이 생길 만큼 결이 가늘고 고운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한산지역에는 한산저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알려주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신라 때에 한 노인이 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유달리 깨끗한 풀이 있어 껍질을 벗겨 보니 그 껍질이 늘씬하고 보들보들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실을 뽑아 베를 짰는데 이것이 한산 모시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산모시짜기
(국가무형문화재제14호)

모시풀이 모시가 되기까지

모시풀을 베어다가 잎은 훑어내어 버립니다. 그리고 남은 줄기의 맨 바깥쪽 껍질도 벗겨 버립니다. 이렇게 표피가 벗겨진 속껍질를 ‘태모시’라고 합니다. 태모시를 한줌씩 묶어 물에 하루쯤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햇볕에 말립니다. 물에 담가 두었다가 햇볕에 바라게 하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할수록 질이 좋은 모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태모시를 다시 물에 적셔서 한 올씩 쪼개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때 올을 가늘게 쪼개느냐 굵게 쪼개느냐에 따라서 모시 품질의 상·중·하가 가려집니다. 그 다음은 뭘 해야 할까요? 기다란 실처럼 만들어야 하니까, 쪼개진 모시올을 연결할 차례가 되겠죠. 짤막한 모시올의 두 끝에다 침을 묻혀 무릎 위에서 손바닥으로 비벼 연결합니다. 이 때 실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한산의 모시삼기 기술은 우수하여 실의 굵기가 일정하다고 합니다.


◑ 나주의 샛골나이
문익점과 목화씨앗

샛골나이는 무명짜기 기능을 일컫는 말입니다. 샛골은 지명 이름이고, ‘나이’라는 말은 베짜기라는 의미의 ‘길쌈’을 뜻합니다.
우리나라의 무명은 1년생 전통직물입니다. 우리나라에 무명이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 공민왕 13년인 1364년의 일입니다. 문익점 선생이 중국의 원에 갔다가 붓통에 숨겨 가지고 돌아 온 10알의 씨앗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익점은 이것을 장인 정천익에게 주어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 심게 하였습니다. 그 10알 중에서 겨우 한 알에 싹이 터서 10년도 못되어 전국에 퍼졌고 조선시대 1400년(태종 원년)에는 백성 모두가 면직물을 입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주의샛골나이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

목화씨앗을 빼야 실이 될 수 있어요

샛골나이의 재료인 목화의 생산은 음력 3월 말에 보리밭의 보릿골 사이에 목화씨를 뿌리면서 시작됩니다. 목화씨는 씨를 뿌리기 전 오줌동이에 잠깐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아궁이의 재를 묻힌 다음 햇볕에 잘 말렸다가 쓴다고 합니다.
대체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싹을 뿌려서 4개월 정도 지나고 나면 정말 탐스러운 솜을 토해냅니다. 이 솜을 수확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수확한 솜에는 목화씨앗이 함께 들어 있어요. 그래서 씨앗을 먼저 뽑아내야 해요.
그 많은 씨앗을 어떻게 일일이 골라내야 할까요?

베틀의 세부명칭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했던 정천익 또한 그런 생각을 했었나 봐요. 그래서 씨를 손쉽게 빼낼 수 있는 ‘씨아’라는 기구를 만들었다고 해요. 수카락과 암카락 사이에 목화솜을 밀어 넣고 씨아손을 돌리면 솜은 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씨는 뒤로 떨어집니다. 씨를 빼낸 솜은 손가락 굵기의 고치모양으로 만들어 둡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실을 만들어야 되겠죠. 그것을 ‘실잣기’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또 ‘물레’라는 기구를 이용합니다. 왜 이름이 물레냐구요?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가 만들었기 때문에 물레라고 한답니다. 물레를 이용한 실잣기는 실로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하답니다. 이 과정의 손놀림이 얼마나 섬세하느냐에 따라 실의 가늘기, 모양이나 빛깔의 균형이 좌우됩니다. 이렇게 뽑아진 실을 다시 ‘베날기’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씨실과 날실을 만들어 베틀로 베를 짜게 됩니다.


◑ 명주짜기
누에고치가 실이 되요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동북아시아 뽕나무지역에서 누에를 키우면서 비단을 짜고 살았습니다. 명주짜기는 아주 오랜 옛날 기자조선·부여 등의 시기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월정사 8각9층 석탑 속에서는 비단 유물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현재 서울의 잠실이라는 곳도 예전에 뽕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뽕나무‘잠(蠶)’자가 지역이름에 들어간 거래요. 우리나라에서는 명주짜기와 관련된 기술을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명주짜기를 하려면 우선 누에치기를 해야 합니다. 누에에서 생산되는 누에고치를 가지고 실내리기, 날기, 매기의 과정을 거쳐 베틀에서 베를 짜게 되니까요. 누에가 알에서 깨어나 고치를 만들 때까지 40일밖에 걸리지 않는대요. 따라서 누에에게 뽕잎을 얼마나 제공할 수 있느냐에 따라 1년에 몇 번씩 누에치기를 할 수 있어요. 뽕잎을 먹고 자란 누에는 입으로 명주실을 뽑아 3일 만에 고치를 다 짓는대요. 이 고치로부터 실을 뽑아냅니다. 한 개의 고치에서 1,200∼1,500m 안팎의 실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연섬유 가운데 가장 긴 것으로 실 뽑는 과정에 있어서도 다른 직물에 비해 간단하고 시간이 적게 듭니다.


시할머니, 시어머니, 며느리, 손자며느리, 그리고……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명주짜기 기능 보유자인 조옥이 할머니는 누에를 치고 실을 잣고 명주를 짜는 모든 일을 시어머니이신 남양 홍 씨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남양 할머니도 그 시어머니이신 동래 정씨로부터 이어받았으며, 이러한 전승은 경상북도 성주 두리실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조상인 여흥민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흥 민씨가 이곳에 와서 가족이 입을 옷을 스스로 만들었고, 그 기법을 집안의 부녀자들에게 전수하여 후손들에게 따뜻한 옷을 공급하는 동시에 근면(부지런함)하고 검소하게 살도록 일깨워 주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