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 메뉴 바로가기 하단 사이트 정보 바로가기


무형문화재
4.발탈

아마 ‘탈놀이’ 하면 ‘탈을 머리에 쓰거나 몸에 뒤집어쓰고 하는 것’을 생각할 텐데, 발에 탈을 뒤집어씌우고 하면 어떨까요? 발에 탈을 뒤집어쓰고 하는 민속 탈놀이는 없었을까요? 1983년 연극 분야의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된 발탈이 바로 그것입니다.

발탈
발탈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언제부터 했을까요?

발탈은 발에 탈을 걸고 앉아 노는 것으로, 그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70∼80세의 노인들이 어렸을 때 보았다는 증언으로 보아 이미 한말(대한제국, 조선 고종34 (1897)년 10월부터 1910년 8월까지) 때부터 있어 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 전통 예능인들의 생각을 들어보면 경기도 안성의 남사당패가 행한 꼭두각시놀음의 변형으로 보거나 유랑 연예인들에게서 퍼져 나왔다고 하며, 그것이 협률사를 거쳐서 광무대(광무 연간에 지금의 서울 을지로 근처에 세워진 극장)와 가설극장 또는 창극단 등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발탈의 발생지는 일단 안성의 남사당패놀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해지며 이것이 중부지방 일원에서 연극하게 된 이유가 아닌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발탈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요?

당초에는 정애비(허수아비)로 만든 인형(제웅)의 머리 부분을 발바닥에 씌우거나 종이가면을 발에 씌우고 팔은 노끈으로 연결하여 그것을 당기거나 놓으면서 조종했다고 합니다. 그 후 광무대 시절에 박춘재(작고)는 노끈을 꿰어 조작한 것이 아니라 직접 손에 한삼(손을 감추기 위해 두루마기나 여자의 저고리 소맷부리에 덧대던 소매)을 끼고 연희(연극을 하다) 하였으며, 남형우(작고)는 양팔 끝에 노끈을 연결해서 그 노끈을 위로 올려 대나무에 연결하고 그 나무를 양손으로 조정하면서 발탈놀이를 하였다고 합니다. 발탈의 문화재 지정 당시 보유자였던 이동안은 노끈에서 변화된 대나무로 조작하는 탈놀이와 스승 박춘재가 하던 손에 한삼(손을 가리려고 웃옷이나 두루마기, 저고리의 소매에 길게 덧대는 것)을 꿰어 하는 탈놀이 두 가지를 모두 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손에 한삼을 꿰고 하는 것은 손놀음이 불편할 뿐 아니라 장기간 연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포장을 치고 그 안에 누워서 발만 관중에게 내놓고 대나무로 팔을 움직여서 연극하게 된 것입니다.


놀이 방법과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현존하는 발탈을 보면 발탈의 놀이판은 꼭두각시놀음의 포장 막과 비슷한데 가로 130㎝, 세로 100㎝ 정도의 직육면체로 위와 뒤를 터놓고 앞과 옆을 막아 놓았습니다. 탈꾼은 그 안에 누워 발목만을 포장 밖으로 내놓고 거기에다 탈을 씌우고 상의를 입혀 그 속에 대나무를 꿰어서 그것을 양손에 잡고 조종하면서 놉니다. 꼭두각시놀음처럼 포장막 앞에 어릿광대가 앉아 탈꾼과 재치 있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극을 진행시킵니다. 그 옆에는 피리·대금·장구·꽹과리 등의 연주자들이 자리 잡고 반주를 맡습니다. 이 놀이는 먼저 악사들이 길군악을 흥겹게 연주하여 구경꾼을 모은 뒤 탈이 “어흠어흠” 큰 기침을 하고는 “손님이 오셨냐?”라고 어릿광대에게 묻습니다. 어릿광대가 “그 사이 손님이 많이 오셨으니 인사를 여쭈어라” 하고 능청을 떠는 데서 연희가 시작됩니다. 재담과 발탈 꾼의 노래·춤 등이 내용의 주요 요소이며 대사와 소리는 거의 서민들 살림살이에서 나오는 희로애락을 표현합니다. 발탈에 쓰이는 탈의 크기는 가로 20㎝, 세로 25㎝ 정도로 빨간 상투를 틀고 복장은 저고리와 조끼를 입었습니다. 발탈의 연극 대본을 분석하여 보면 팔도유람가를 비롯하여 각 도의 노래가 나오지만, 주로 경기잡가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발탈놀이의 배역은 천민인 조기장수 역을 하는 탈꾼과 조역인 어릿광대, 잠시 미친 여자 역 등 세 사람이 하게 되는데, 이때의 재담은 주로 무엇을 잡아먹는 이야기와 조기를 헤아리는 이야기, 약 먹는 이야기 등이 나옵니다. 그 속에는 잔재주나 장난기, 사회를 보는 비판력과 관찰력이 예리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발탈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발탈의 내용은 풍자적(남의 결점을 빗대어 비웃으면서 공격하는 것)이고 해학적(익살스럽고, 풍자적인)이며 추하기까지 하나, 한편으로는 인간적이고 속임 없이 폭로하는 등 짓눌렸던 당시 서민들의 애환을 꾸밈없이 담고 있다는 데서, 여타의 각 지역 탈놀이에 담긴 의의와 비슷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현재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요?

박춘재의 제자 이동안이 초대 기능보유자였고 그의 발탈은 줄 인형이 변화된 장대인형극적 양식을 갖춘 탈놀이로서 광대들이 규모를 작게 하여 연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박해일이 보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