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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2.동, 서, 남, 북 그리고 어디일까요?(처용무)

처용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처용은 동해용의 아들 이름이며 처용무란 처용의 춤을 말합니다. 물론 지금의 처용무는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하지요. 그럼 처용은 왜 춤을 추었으며, 그 춤은 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올 만큼 유명해진 것일까요? 그에 대한 해답이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산)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몰려와 그 이유를 신하에게 물으니 그것은 동해용이 그렇게 한 것이므로 좋은 일을 하면 풀릴 것이라 했다. 왕이 용을 위하여 절을 근처에 세우도록 명하니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져 그때부터 개운포(開雲浦:구름이 열린 물가)라 부르게 되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무용을 연주하였다. 그중 한 아들은 임금을 따라 서울에 가서 정사(政事)를 도왔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하였으며, 왕이 미녀를 아내로 삼게 하고 벼슬도 주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돌림병 귀신)이 반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하였다. 처용이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나가니 역신이 처용의 앞에 나아와 꿇어앉아 ‘내가 공(公)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잘못을 저질렀는데 공이 노하지 아니하니 감격하였다. 이제부터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노라’고 말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에 붙여 나쁜 귀신을 물리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풍습은 신라 말까지 전해 내려오면서 처용가로 만들어지고 또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발달된 것입니다.


처용무는 어떻게 전해져 왔을까요?

처용무는 신라를 거쳐 고려 말까지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추었다고 합니다.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여 지금과 같이 다섯 사람이 추는 처용무로 만들어졌으며 반주무용과 가사 또한 바뀌었고, 성종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완전한 무용으로 정립되어 궁중의식에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조선말까지 노래의 가사나 무용을 바꾸어 가면서 전해 내려왔으며, 해방 후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이어 받아 무대에 오르기도 하면서 전수되어 오다가,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전되고 있습니다.


처용무는 어떻게 출까요?

여러분들이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북쪽을 향하여 서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그 오른쪽은 동쪽이 되고, 왼쪽은 서쪽, 그리고 등 뒤는 남쪽, 눈이 바라보고 있는 쪽은 북쪽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동, 서, 남, 북의 한가운데인 중앙입니다. 처용무는 이렇게 다섯 위치, 즉 오방에 서서 춤을 춥니다. 그래서 ‘오방처용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면 왜 굳이 다섯 군데에 서서 춤을 추었을까요? 우리 조상들에게 ‘5’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방(다섯 군데의 방향), 오장(다섯 개의 내장기관), 오색(다섯 가지 색깔), 오미(다섯 가지 맛), 오음(다섯 음) 등 우주의 모든 현상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이것들이 기본이 되어 우주의 질서를 이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처용문
처용무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그래서 처용무를 추는 사람들은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홍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의 다섯 가지 색깔의 옷을 입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화려한 색상이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의 가면과 조화를 이루어 궁중무용의 화려함과 여유를 보여줍니다. 여느 무용들과 마찬가지로 처용무에도 무용이 따릅니다. 반주무용만이 아닌 노래도 같이 곁들여집니다. 반주무용인 수제천은 궁중무용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용으로 꼽히며, 이러한 무용에 맞추어 펼쳐지는 처용무의 춤가락 또한 부드러우면서 당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