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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2.고구려 사람들의 힘찬 발걸음 (충주 고구려비, 광개토대왕릉비)

산소와 절터, 향교 등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비석들을 보았을 것입니다.그렇지만 그 비석의 주인이 누구이고 언제 세웠는지, 무슨 내용을 썼고 왜 세웠는지를 생각하며 보지 않고 무심코 지나쳤지요? 하지만 관심을 갖고 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답니다. 우선 마을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어요. 아주 옛날 누가 우리 마을에 살았고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았는지 알 수 있거든요. 자! 그럼 이러한 비석 중에서 가장 오래됐고 고구려 사람들의 힘찬 발걸음을 느낄 수 있는 충주 고구려비와 광개토대왕릉비를 찾아가 볼까요?


충주 고구려비가 국보로 정해진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비가 고구려비인 것이 확인되던 날 “아니! 고구려가 충주지역까지!!” 삼국시대의 지도가 바뀌는 큰 발견이었지요.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구려가 한강이북 지역까지만 진출했다고 알고 있었어요. 즉,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이므로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 충주지역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에요. 옛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인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을 해방 이후 고고학계의 3대 발견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해요. 우물가의 빨래판이었던 돌이 국보로 정해진 까닭을 아시겠지요?


남한 내의 유일한 고구려비 - 충주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어요.
높이 144cm, 너비 55cm, 두께 37cm인 비석인데 국보 제 205호로 정해졌어요.
1979년 2월 충주의 지방사연구단체인 ‘예성동호회’에서 이 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조사하게 되었대요. 처음엔 비 전체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탁본을 하여도 글자를 해석하기가 어려웠대요.
오랜 세월이 흘러 돌이 닳기도 했지만 올록볼록한 이 돌이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빨래판으로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돌이 고구려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비에 쓰여 있는 글씨를 통해서예요.

비문을 해석해 보면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첫째,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때 ‘고려’는 ‘고구려’를 뜻하고,
둘째,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사자(使者)’ 등 고구려의 관직 이름이 보이며,
셋째, 만주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보이고,
넷째, ‘신라매금’, ‘모인삼백’, ‘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이 나오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 - 광개토대왕릉비

‘이 넓은 만주 벌판이 우리 땅이었다니!……’ 고구려 최전성기였던 5세기 지도를 보면 지금보다 몇 배나 땅이 넓은 것을 알 수 있어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영토를 많이 넓힌 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어요.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지역)에 광개토대왕의 능과 함께 세웠지요.
높이가 639cm, 너비가 270cm, 두께가 335cm로 충주 고구려비보다 약 5배 정도가 커요. 아파트 3층 높이니까 어마어마하게 크죠. 충주 고구려비처럼 4면에 글자를 새겼고 모두 44행 1,775자예요. 앞머리에는 건국시조인 주몽에서부터 광개토대왕까지 왕들의 계보와 업적이 적혀 있고, 본문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과 경계지역을 돌아본 일들이 적혀 있으며, 끝머리는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들의 이름이 쓰여 있어요. 광개토대왕릉비 한 글자 크기가 가로·세로 14∼15cm라니, 한번 상상해 보세요. 1,775자를 다 조각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까요?

광개토대왕비

돌에다 글씨를 힘들게 새긴 까닭은 뭘까요?

어떤 사건이나 흔적, 역사를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나무나 돌, 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을 비(碑)라고 해요. 비는 만드는 재료에 따라 목비, 석비, 철비로 나누는데 우리나라에는 목비가 남아 있는 것은 없고, 거의 대부분이 석비예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목비는 불에 잘 타고 벌레나 비바람에 잘 썩어 보관하기가 힘들지만 석비는 재료인 화강암을 전국 어디서나 구하기 쉽고, 나무에 비해 불이나 다른 자연조건의 영향을 덜 받아 오랜 기간 동안 비석의 내용을 후세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옛날 사람들은 돌을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가는 상징물로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누구나 비석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주로 왕이나 스님, 지배층들만이 비석을 세울 수 있었답니다.


우리 마을에서 비석을 찾아봐요.

‘영토를 확장하고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통일하고…. 이런 역사가 반복되는 순간에도 우리 마을에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고 계셨을 겁니다. 충주 고구려비나 광개토대왕릉비를 보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듯이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마을의 묘비, 송덕비. 사당비 등을 통해서 우리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답니다. 우리 마을에 비석이 있나요? 누구의 비석이지요? 언제 세워졌어요? 비석을 왜 세웠어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나요? 자! 이제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학교 근처의 비석을 찾아가며 실감나는 역사를 배워보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