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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1.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삼국통일
진흥왕은 어떤 분인가요?

신라 제24대 임금인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가 되게 하였고, 이듬해 백제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쳤으며, 562년에는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어 주변 나라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한강 유역에 강력한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새로 개척한 땅에는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광개토왕, 백제의 근초고왕과 함께 영토 확장의 3대 인물로 꼽히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576년(진흥왕 37) 화랑제도를 만들어 김유신, 사다함 등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 삼국통일의 기틀을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진흥왕은 흥륜사, 법주사와 같은 절을 지어 불교를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이사부(거칠부)에게 《국사》라는 역사책을 만들게 하였으며 우륵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구하게 하는 등 여러 면에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신라진흥왕순수비는 왜 세웠나요?

진흥왕은 백제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의 땅인 한강 상류지역을 빼앗고,
대가야와 함께 쳐들어 온 백제 성왕을 관산성 싸움에서 크게 물리쳐 한강 중류지대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후 가야에 대한 정복 사업을 펴 완산주를 설치하였고, 가야의 여러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여 신라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순수(巡狩;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한 곳마다 기념비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넓어진 국경을 표시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 비석들은 광개토대왕릉비 다음으로 귀중한 금석문으로 유명하며, 당시 신라의 영토를 연구하는데 매우 가치가 높은 유물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창녕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 4개입니다.
북한산비는 국보 제3호로써 진흥왕이 순수한 기념으로 북한산에 있는 비봉(북한산에 있는 봉우리 중 하나)의 꼭대기에 세운 것입니다. 높이 1.54m, 너비 0.7m, 두께 0.16m의 크기인데 다른 진흥왕순수비와는 달리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제3호)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창녕비가 세워진 561년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568년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북한산비는 1972년 8월에 경복궁 근정전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1986년 8월에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로 옮겨졌습니다. 한편, 비가 서 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적 제228호로 지정하였습니다. 마운령비는 568년에 진흥왕이 신라의 확장된 영토를 돌아보고 세운 것인데 함경남도 이원의 마운령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당시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진흥왕의 기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문에는 비를 세운 까닭과 진흥왕의 업적, 수행한 사람의 직위와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유물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함흥시에 있는 함흥본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삼국 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우리나라의 여러 부족 국가 중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나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었습니다. 이 세 나라가 서로 경쟁하면서 한반도에 자리 잡아 가던 시대를 삼국시대라고 합니다. 삼국시대 때,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세 나라의 싸움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고구려가 패권을 잡아 신라와 백제를 눌렀습니다.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수도인 한성과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이에 맞섰습니다. 그리하여 백제는 한강유역을 되찾았으나 다시 동맹군이었던 신라의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에 성왕은 신라에 보복하기 위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백제의 기세를 꺾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의 진흥왕은 함경도의 남부 지방까지 세력을 뻗쳤고, 가야마저 완전히 정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진흥왕의 영토 확장은 그가 세운 4개의 순수비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주요
비석위치도

신라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고구려와 백제는 여제동맹을 맺고 신라의 위협을 막았습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김유신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660년(무열왕7)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귀족간의 세력 다툼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틈을 노려 당나라는 북쪽에서 신라는 남쪽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마침내 평양성은 완전히 포위되고 고구려의 보장왕은 668년(문무왕 8)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영토까지 엿보았습니다. 이에 맞서 신라의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하여 8년 뒤인 676년에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습니다. 드디어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