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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1.임금님과 궁궐(경복궁)
궁궐은 임금이 생활하던 곳이예요. 궁궐은 왕이 살기 때문에 나라의 우수한 과학기술, 문화를 총동원해서 솜씨를 맘껏 발휘하게 되지요. 그래서 궁궐을 알면 당시의 사상과 문화, 사회상, 과학기술의 수준을 알 수 있어요.

경복궁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왕의 군위와 정통성을 보이기 위해서 경복궁을
세웠어요. 초기의 경복궁은 390여 칸으로 근정전과 강녕전, 연생전 등 주요 건물들만 있었으나 경회루도 다시 짓고 점차 건물의 수를 늘렸어요. 그러다 임진왜란 때 불이 나 폐허가 되었어요. 다시 지으려 했지만, 워낙 큰 일이라 하지 못하다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중건(절이나 왕궁 따위를 보수하거나 고쳐 지음) 하여 궁궐로 사용했어요.
경복궁
(사적 제117호)
중건했을 때는 원래보다 훨씬 많은 7,000칸이 넘는 규모였어요. 이렇게 큰 규모로 중건한 것은 흥선대원군에게 약화된 왕권을 강화할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현재 경복궁은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정 면적이 343,888㎡나 되며, 많은 국보와 보물이 있는 소중한 문화유적이지요.

근정전과 경회루
왕이 사는 데 무슨 건물이 필요할까요? 왕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면 궁궐의 많은 건물들의 용도나 의미를 구조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한 나라의 왕이니까 정치활동을 하지요. 신하들과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이야기하고 결정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일을 했어요. 이렇게 정치활동에 필요한 건물로 사정전근정전이 있어요.
사정전이 일상적인 정치행위를 하는 곳이라면, 근정전은 아침인사를 받고 , 와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 같은 국가의 공식적인 큰 행사를 하는 곳이었어요. 그 가운데 근정전은 경복궁의 가장 중심영역으로서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정치적인 활동과 권위, 정통성을 더욱 잘 나타내기 위해 근정전 주변에는 특징적인 건축양식이 많이 나타납니다.

경복궁 근정전 근정전은 측면 5칸으로 우리 나라 목조 건축 중에서 가장 크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임금님이 계신 곳으로서 장중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주지요. 특별히 2중으로 높은 기단을 만들어서 월대라고 했어요.
경복궁 근정전
(국보 제223호)
근정전십이지
근정전행렬
기단의 난간이 꺾이는 곳마다 일반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수호신과 12지신상을 세웠지요. 근정전 앞마당은 주위를 행각으로 둘러싸서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막아 주고, 품계석을 늘어 놓아 질서정연하고 엄숙한 모습을 자아내지요. 이 분위기는 《근정전하정의궤》에 나타난 ‘경복궁찬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근정전을 중심으로 내외의 신하들이 절하며 엎드려 행렬을 이룬것을 자세히 볼 수 있어요. 월대 위에는 차일을 치고 건물 내부와 바깥에 많은 중신들이 격을 맡추어 배열하고 의식용 기를 세웠어요. 근정문과 행각 밖으로는ㄴ호위를 하는 군사들이 줄을 서 있어요. 이 그림을 보면 당시의 엄격한 궁중의식을 알 수가 있지요.
남산에서 내려다보면 궁궐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지금처럼 높은 건물이 없는 조선시대를 상상해 보세요. 경복궁의 근정전과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남북축의 연장선에 넓은 길(주작대로)이 길게 뻗어 있고, 주작대로에는 의정부, 육조, 한성부, 관아가 좌우에 있어요. 마치 경복궁이 임금이고, 주작대로가 삼도가 되고, 좌우 관청들은 품계석에 늘어서 있는 신하들처럼 줄지어 있는 형상이에요.
왕이라고 늘 일만 했을까요? 아니겠지요. 쉴 수도 있고 손님을 맞이하며 쉴 수 있는 곳도 필요했겠지요. 바로 경회루예요. 이곳에서 활쏘기를 하고, 시도 쓰며, 잔치도 베풀었답니다. 경회루는 잔치를 하는 곳이니 누각으로 만들어 확 트인 시야도 얻고, 주위는 연못을 파고,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꽃과 나무들을 심어 아름답게 했지요. 경회루도 단일 평면적 구성으로 가장 큰 누각이에요.
경복궁 경회루
(국보 제224호)
경회루 정면 7칸, 측면 5칸의 팔작 건물로 아래층은 사각형의 돌로 된 기둥을 세워 큰 건물을 강하게 받쳐주고 있어요. 2층으로 오르면, 바닥에 마루를 깔았는데 평평한 것이 아니라 3단계로 나누어져 있어요.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이 왕을 위한 자리지요.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어요. 경복궁 경회루는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어요.

왜 이건물은 '-전'이고,저 건물은 '-당'이예요?
‘전’은 임금이나 신이 있는 곳에만 쓰는 것이에요. 가장 격이 높은 건물에 붙었지요. 건물의 크기도 가장 웅장하고 화려해요. 절에서도 ‘전’은 ‘대웅전’이나 ‘무량수전’과 같이 부처를 모신 건물에만 쓰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어요.
‘당’은 규모가 비슷하더라도 왕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쓰거나 일상생활 공간에 붙였어요. ‘헌’은 대청이 있는 집으로, 군·현의 현감이 쓰는 건물 정도에 쓸 수 있는 이름이었어요. ‘루’는 온돌이 아니라 땅에서 사람높이 정도로 높이 올려 지은 건물을 말해요.
근정전은 왜 근정전(勤政殿)일까요? 나라를 돌보는 일에 근면하라는 뜻이지요. 왕에게 편히 쉬면서 나라 일을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늘 수양하며, 성실하라고 요구한 것이지요.
그럼 경회루(慶會樓)는 무슨 뜻일까요?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하는 데는 함께 일하는 사람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했어요.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자는 뜻에서 경회라고 한 것이지요.

지방에도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건물이 있나요?
지방에는 객사라고 하는 왕위 상징하 ‘전(殿)’자를 새긴 위패인 ‘전패’나 ‘궐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과 관속들이 이를 모시고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은 대역죄였기 때문에 훔친 사람은 물론 일가족이 처형되었고, 그 고을은 이웃 고을에 병합되고, 수령이 파면되는 큰 벌이 내려졌기 때문에 수령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은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도 있었어요.
강릉 임영관 삼문
(국보 제51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요?
궁궐에는 놀랍게도 궁녀와 내시만해도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낮에는 승지나 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니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궁녀는 옷과 음식, 제사를 준비하는 등 왕실의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일을 했어요. 왕에게만 궁녀와 시녀가 150명이 배치되었고, 왕비와 대비, 세자, 세자빈, 세손들에도 수십 명에서 130여 명까지 배치했어요.
내시는 왕의 명령 전달, 문을 지키기, 관리의 일을 도와주기, 궁궐의 수리와 청소 같은 왕실의 정치·행정 업무 편의를 위해 일했는데, 영조 때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몇 사람을 위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봉사했지요. 이렇게 이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먹고 자고, 드나들며 활동했어요. 심지어 화장실도 23개 정도가 있었다고 하니, 경복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왜 지금은 건물이 조금밖에 없나요?
그것은 일제가 우리 나라의 권위를 짓밟기 위해 왕조국가의 상징인 궁궐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면서 시작되었어요. 경복궁은 왕조국가 조선의 상징으로 정치·행정의 중심지이고, 백성들에게도 나라의 위신이고 단결의 구심이었는데, 그 권위를 무너뜨리려고한 것이었지요. 많은 부속 건물을 일본인에게 팔거나 일본의 관공서로 사용했어요. 심지어 부수거나 옮겨서 원래의 경관을 다 파괴했지요. 1915년에는 궐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며 전각들을 부수고 서양식 건물을 세웠어요.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전에 없던 잔디밭을 만들었어요. 지금 경복궁 안에 있는 넓은 잔디밭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지요. 여러분이 다 아는 조선총독부는 그 대표적인 예예요. 결국, 주요 건물 몇 개만 남아서 지금 모습이 된 것이지요.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당시의 역사와 사상,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좋은 역사관이에요. 요즘 경복궁 복원을 하고 있는데, 복원을 한다면 옛날 모습을 더 잘 알 수 있을 거예요.